
아직도 그러한 날들은 자연스레 머릿속에 떠오른다. 어쩌면 가라앉아있다가 떠오른다고 표현할 게 아니라 이미 단단히 어딘가에 고정되어서 빠지지 않는 거라 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언제부터 뇌 속에 그러한 불쾌한 기억이 자리 잡았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진짜 끝에 가까워졌다는 증명일 수도. 사실 어찌 표현하든 딱히 상관은 없었다. 이미 절정에 다다른 이상 끝맺음은 확실히 해야 했다.
대개의 미개한 사람들은 급작스럽게 뭔가가 닥치면 어쩔 줄 몰라 쓸데없는 식은땀이나 잔뜩 흘려대면서 말을 더듬는다. 나는, 우리는 그런 종류의 것은 아니네. 살짝 흐뭇해서 더 웃어 보였다. 감정의 혼합물이 순물질로 분해되는 순간이었다.
내 꾹 다문 손에서 피가 흘러나오지 않게 힘을 살짝 조정했다. 내 광대가 더 이상 올라가서 승천해 버리지 않게. 그래서... 평정심을 잃지 않게. 숨을 가뿐하게 쉬며 무게를 던 이후에, 나는 다시 머리를 만져 정리했다. 내 앞에 선 사람이 누구인지 다시 확인한 뒤에, 마음가짐을 또렷이 했다.
여기서 승리하기 위해서.
나를... 지키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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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이 있다더니, 나미유는 갑자기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든 듯이 숨을 골랐다. 머리칼을 정리한 후, 나미유는 섬뜩하게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나미유 카츠키 : 그냥 논파하겠다 말씀하시지 언어 사용이 참 현란하시네요.
센이시 히치카와 : 나미유, 말 돌리지 마. 반론이나 해.
나미유 카츠키 : 반론을 즐기기라도 하시는 것 같네요? 뭐, 우리의 주인공 님이 그토록 원하신다면 저도 사양할 이유가 없겠죠?
누가 누구한테 지금 즐긴다고? 그저 나미유가 여러모로 이상하게만 보였다. 저게 나미유라는 인간의 본성이자 밑바닥인 거겠지. 지금은 제발 단순하게 생각하자, 센이시 히치카와.
이런 나의 생각을 깨뜨린 것은 나미유의 목소리였다.
나미유 카츠키 : 집중해 주세요, 반론할 테니까.
나미유 카츠키 : 범인이 홍차 컵에 복숭아 시럽을 발라뒀다 하셨죠? 그런데 복숭아 시럽을 가지고 온 건 사망추정시각, 이때는 상담실 안에 하타미츠 씨가 있어요. 복숭아 시럽을 당당히 들고 들어갈 수가 없단 말이죠.
센이시 히치카와 : 간단하잖아. 복숭아 시럽을 손에 부어서 들어가면 돼.
나미유는 첫 번째 반론이 간단히 부서지자 살짝 긴장한 듯했지만, 금세 다시 표정을 여유롭게 바꾸며 그게 아니라는 걸 증명해 버렸다.
나미유 카츠키 : 다음. 저희는 범인이 사망추정시각 내에 아주 정밀하고 복잡한 로프 트릭을 설치했다고 추리했었죠? 그런데 그러면 필연적으로 스프링클러에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네요? 그렇게 되면 옷이 모조리 젖고 말 거예요. 이 점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센이시 히치카와 : 그건 너 말고도 똑같잖아. 확실히 짚고 넘어가긴 해야겠지만 네가 범인이 아니라는 증명은 아니야.
나미유 카츠키 : 아니죠. 저는 더 특수한 상황이 있다고요?
나미유는 자신의 머리 위에 손바닥을 툭 얹었다. 그리고 오른 손목에 왼손의 손가락 두 개를 휘감았다. 검지와 엄지였는데, 딱 봐도 손가락이 만난 것을 넘어 공간이 남아도는 것 같았다.
나미유 카츠키 :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전 키가 여기서 제일 작아요. 반면 하타미츠 씨는 어떤가요? 그렇게 클 수가 없어요. 저랑 한 30cm는 차이 날 걸요.
나미유 카츠키 : 또, 제가 말하긴 살짝 뭐 하지만 이 가녀린 팔을 보세요. 힘도 약한 제가 하타미츠 씨 같은 사람을 어떻게 옮겨요? 심지어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개인실 앞에서? 단시간에 옮기지 못하면 처형시켜 달라고 광고하는 꼴이잖아요. 유레이 님 같이 건장한 사람이면 모를까요.
난 유레이를 살짝 바라보았다. 확실히 나미유와 비교하면 훨씬 팔이 굵고 듬직하다. 반면 나미유는 바람이 조금이라도 세게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체형에 최장신인 유레이와 대비되어,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정말 가녀려 보인다.
센이시 히치카와 : 그래도, 하타미츠도 꽤 말랐으니까... 아무리 네가 힘이 약하더라도 끌고 가면 괜찮지 않을까? 시체를 끌어본 적이 없어서 확신은 없지만, 아까 오마지나를 보니 되게 가뿐하게 들어 올리던데.
오마지나 하나시 : 맞아. 몸은 길쭉한데 무게가 진짜 가볍더라. 뭘 먹고 다니긴 한 건가? 아무튼, 그 정도면 질질 끌고 가면 너라도 가능할걸.
나미유 카츠키 : 쳇, 당신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마시죠. 좌우간, 시체를 끌고 옮기는 게 가능하다 해도, 유동인구가 많은 개인실 앞에서 옮기는 건 얘기가 달라요. 어떻게 하실래요?
다시 반론으로 돌아와서, 나는 "유동인구"에 집중했다. 분명 오늘 일어난 것들 중에 이 건물 안의 모든 사람을 한 군데 모을 만한 일이 있었을 것이다.
센이시 히치카와 : 개인실 앞에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을 시간이 딱 하나 있어. 4시 정각이지.
하나리 에린 : 아..! 그렇구나..! 대부분은 공연 시간에 딱 맞춰 가기보다는 조금 일찍 오는 편을 선호할 테니까.
나미유 카츠키 : 흐응... 그런가요? 아닐 텐데요, 한 번 더 증언을 잘 떠올려 보세요. 후카바야시 님이 뭐라고 말씀 안 하셨나요?
후카바야시 츠이키 : 응? 갑자기 나?
나는 후카바야시가 조사시간에 했던 증언을 떠올리고서 맹해졌다. 나미유는 4시에 목격 증언이 있다..!
후카바야시 츠이키 : 으음... 아, 맞아. 내가 4시쯤에 공연 보려고 개인실에서 나왔는데, 나미유 녀석도 방금 나왔는지 내 앞에 걸어가더라고? 그래서 얼른 붙잡아서 같이 갔지.
나미유 카츠키 : 이제 나왔죠? 전 그 시간대에 시체를 옮길 수가 없어요. 백번 양보해서 후카바야시 님의 눈에 띄지 않고 창고까지 가서 트릭까지 설치했다 치죠. 그러면 제 옷이 다 젖을 텐데... 후카바야시 님, 저를 만났을 때 제가 젖었던가요?
후카바야시 츠이키 : 아니, 뽀송했었지!
센이시 히치카와 : 뭐...라고..?!
나는 아주 급격히 당황했다. 나미유는 사망추정시각 전체엔 알리바이가 없지만 결정적인 시각에는 알리바이가 있다. 아니, 거의 끝이니까 침착하게... 조금 더 침착하게 문제를 바라보자.
센이시 히치카와 : ... 모두의 도움이 필요해. 범인을 잡기 위해서야.
시나하라 아쿠아 : 최선을 다해 도울게! 뭘 하면 될까?
센이시 히치카와 : 고마워. 스프링클러가 작동되었을 때 옷이 젖지 않을 방법에 대해 논의해 줬으면 해.
나미유 카츠키 : 아직도 포기하지 않으신 건가요? 제가 보기엔 막다른 길 같은데~
나는 나미유의 말을 무시했다. 난 그녀가 범인이라고 확신하지만, 증거를 들이밀어 확실하게 그녀를 항복하게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것이다. 나미유가 결과를 받아들일 때까지.
목이 순식간에 건조해지고 따끔거린다. 아무리 침을 삼켜봐도 여전히 그렇다. 하지만, 아직 진실을 외칠 기력은 남아있다. 내가 봐도 막다른 길이지만 그러면 개구멍을 뚫어서라도 나아가야 한다..!
히네노야 나오미 : 스프링클러가 작동되었을 때... 옷이 젖지 않을 방법이라...
후카바야시 츠이키 : 그냥 마찰이 안 생기게 존나 조심하면 되는 거 아님? 쟤 진짜 뽀송했다니까?
토라시 치사토루 : 그게 말이 된다 생각하나... 옷을 단시간에 말릴 수는 없다 아이가.
에스티 : 냅다 옷을 갈아입었을 리도 없고...
에스티의 말을 듣고 떠올랐다. '옷을 갈아입었을 리는 없다'라... 한 가지 번뜩, 생긴 아이디어가 있다..!
센이시 히치카와 : 에스티..! 그건 아니야..!
에스티 : 아, 깜짝이야. 뭐... 내 말이 틀렸다는 건 범인이 젖은 옷을 갈아입은 거라는 얘기? 하지만 후카바야시가 나미유는 뽀송했다고 했었고, 젖은 채로 개인실까지 가려다 들키면 끝장이잖아.
센이시 히치카와 : 범인이 개인실까지 가야 했다면 그렇지. 하지만... 개인실에서 갈아입은 게 아니라면?
센이시 히치카와 : 범인은 4시 전에 복숭아 시럽과 풀을 챙기기 위해 창고에 들를 필요가 있었어. 그때 젖지 않은 옷을 창고에 갖다 놓고, 나중에 스프링클러가 작동된 후 그 옷으로 갈아입은 거지.
내 말이 끝나자 나미유가 지겹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아까까지는 범인의 마지막 발악이라 생각했는데 시간을 이렇게까지 끄니 이제 저 웃음도 슬슬 무서워진다.
나미유 카츠키 : 그게 무슨 추리인가요. 문제점이 있어요. 첫 번째, 스프링클러가 작동되면 갖다 놓았던 옷도 젖어버려요. 두 번째, 갈아입은 후 남은 젖은 옷은 어떻게 처리하실 건데요?
센이시 히치카와 : 첫 번째, 갖다 놓은 옷을 젖어도 되는 다른 물건으로 덮어놓으면 해결돼. 누가 중간에 창고에 들어와도 보이지 않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지. 두 번째, 네가 입고 있는 그 옷 속에 넣으면 돼.
나는 나미유의 옷을 가리켰다. 마침 나미유는 일자에 '가녀린' 몸을 지녔으니 조금 옷이 부풀어도 별로 티가 나지 않겠지. 우리는 서로 스치듯 보고, 누군가를 뚫어져라 쳐다볼 일도 없으니까.
나미유 카츠키 : 프흣, 그게 말인가요? 네, 그렇게 처리했다고 칩시다. 그렇다 해도 언제까지나 그러고 있을 수 없잖아요. 원하시면 옷을 까볼까요? 아무것도 없는데.
나미유 카츠키 : 전 시체가 발견된 뒤 쭉 체육관에만 있었어요. 그 뻥 뚫린 체육관에서요. 옷을 숨길 곳도 없는 체육관에서요.
센이시 히치카와 : 그건 틀렸어! 단상 위 커튼 뒤가 있잖아! 아니. 어쩌면...
나미유는 체육관이 중요한 장소라고 생각해 조사 시간 내내 그곳에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나미유가 범인이고, 젖은 옷을 숨길 필요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건 더 이상 조사가 아니라 자리 지키기다. 단상의 커튼 뒤에 옷을 숨기고, 혹여 자리를 비웠다가 누군가 찾아낼까 봐 체육관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 생각해 보면...
나미유는 뒤돌아 단상으로 올라갔다. 아마도 조사를 하기 위함이겠지.
나미유 카츠키 : ㅇ, 앗, 가시게요? 들어오신 지 얼마 안 되시지 않았나요?
나미유 카츠키 : 아아... 네. 걱정 마세요. 제가 여러분 몫까지 조사할 테니까요.
그 발언 하나하나, 그 행동 하나하나에 다 수상함이 깃들어있었다. 지금으로선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
센이시 히치카와 : 그래. 그런 거지?
나미유 카츠키 : 하아... 듣자 듣자 하니 점점 더 산으로 가는군요? 상상력이 방대하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해 드리죠. 하지만... 방금 그 트릭의 문제점이 하나 더 떠올랐는걸요.
나미유 카츠키 : 옷이야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다고 치자고요. 그런데 머리는요? 머리카락은 그렇게 갈아 낀다고 될 게 아니거든요. 단시간에 마르지도 않고... 아, 전 가발 안 써요.
나미유는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두피가 같이 딸려왔다. 가발은 당연히 아니겠지만, 확실히 나미유의 반론은 생각해 볼 문제다.
캡틴 유레이 : 방에 드라이기가 없나?
나미유 카츠키 : 당연하죠. 당신은 머리를 감지도 않나요? 그 정도도 모를 리가...
캡틴 유레이 : 아, 아니, 여자들의 방이라면 뭔가 다를 줄 알았다.
나미유 카츠키 : 아무튼... 제 머리는 젖어있지 않았으니 전 스프링클러를 맞은 적이 없고, 창고에도 안 들어갔고, 하타미츠 씨를 죽이지도 않았다는 말이 되네요.
우산 같은 걸 쓰면 되잖아! 하지만 나는 이곳에서 우산을 본 적이 없다. 후드티를 입었다면 또 모를까, 나미유에게는 그런 게 보이지 않았다. 머리를 덮을 수 있는 동시에 나미유와 관련된 물건..? 하나 완벽한 게 있다.
센이시 히치카와 : 한 가지, 가능성이 있어. 베일을 쓰는 거야.
나미유가 미간을 찌푸렸다.
나미유 카츠키 : 베일이요? 그게 뭔지는 아세요? 베일은 수녀가 쓰는 거예요. 저는 성직자인 아버지를 따라 재능을 발견해 수녀 말고 성직자가 된 거랍니다. 성직자랑 수녀는 아주 명백히 다르고요. 제가 베일을 가지고 있을 리가-
센이시 히치카와 : 있어. 확실히 그런 차이는 몰랐지만... 모노키츠네는 의외로 직종을 정확히 따져서 개인실을 꾸미지 않아.
나는 니에류우를 따라서 그의 개인실에 입성했다. 아무리 초고교급 수사반이라고 해도 방에 수갑을 벽에 도배해 놓다니... 심지어 진압봉과 톤파는 물론이고 니에류우와 전혀 상관없는, 교통경찰이 쓰는 경광봉까지 있었다. 같은 경찰이니 됐다는 건가...
이제는 먼 이야기가 되어 버렸지만, 니에류우의 방에 들어갔을 때... 분명 그랬었다. 잘은 모르지만 누군가를 지휘하기보단 몸으로 뛰는 직종인 수사반은 그 특성상 경광봉을 자주 쓰진 않을 터인데, 경광봉도 있었으니 성직자의 방에 수녀의 베일이 있어도 이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미유 카츠키 : 어머, 그랬군요. 하지만 일반화는 하지 마세요. 제 방에 며칠간 묵었지만 베일은 없었어요.
신마에 히요리 : 말은 다... 그렇게 하겠지... 그리고, 꼭 베일뿐 아니라 그냥 아무거나 머리를 가릴 수 있는 건 다 되잖아...
나미유 카츠키 : 하지만 아주 결정적인 단서는 아니죠? 아직 안 나왔잖아요? 자아, 그러면 이쪽은 논의 끝.
순간적으로 감정이 요동쳤다. 이동안 아무리 감정적인 면을 보여도 이성적으로 돌아오려고, 최소한 남들에게는 그렇게 보이려고 노력했는데. 진짜 '막다른 길'에 다다르니 빠져나갈 곳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막막했다는 한 단어로 일축할 수 있을 정도로.
물적 증거. 저번 재판에서 이레나의 죄를 확정 짓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던 물적 증거가 필요하다. 하지만, 니에류우와 타라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애초에 이런 공상 과학 판타지 소설에나 나올 법한 기적을 바라는 건 중죄겠지.
이곳, 학급재판장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필요하다. 계속해서 사고를 쥐어짜 봐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전제 자체를 바꾸는 것이 정답이 될 수 있겠지만... 무슨 전제를..?
...
... 아, 그래. 그거야.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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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 밝지는 않은 무늬가 그려진 우산이, 하늘 속에서 빙그르르 돌아간다.
이 하늘은 언제쯤 푸르러지려나.
이 말을 수백 번 반복하며 추운 아스팔트 도로 위에서 멍하니 서있다. 모든 게 끝나버려도 하늘은 변함없다는 걸 알기에 그저 가만히 서있다.
"개새끼. 그렇게 맹하게 있지 마. 날 농락하고 갖고 논 주제에."
"어머, 걱정해 주는 걸까나? 고맙게 생각할게."
"오늘은 네 옆에 그냥 서있지만은 않을 거야. 지나칠 거라고."
그가 정말로 날 지나쳐 끝없는 거리로 걸어가려 한다. 저 끝에 뭐가 있는지 알아? 알지 못한다면 무엇을 믿고 무엇을 기대하며 나아가는 거지? 앞으로 나아가는 건 결국 상처만을 낳을 뿐이다. 최대한 현실을 도피하고 내 곁에서 있어야 해. 그게 제일 안전하고 즐거우며 평화로우니까.
난 그의 손목을 끌어당겨 내 곁에 있도록 했다. 손과 손을 꼭 잡고서, 나는 다급하게 외쳤다.
"저 너머에 위험이 있으면 어쩌려고 그래?! 지금 비도 오잖아! 미끄러지면 어쩌려고? 넘어져서 살이 까지면? 난 네가 없으면 안 돼. 마찬가지로 너도 내가 없으면 안 된다고..! 내가 진짜 너 좋아하는 거... 알잖아. 떠나지 말아 줘..."
"좆 까. 갈 거니까 놔."
"네가 가면 난 어떻게 살라고..? 나보고 그냥 사라지란 말이야? 난 널 지키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고..!"
"뭘 지켜? 내가 이렇게 된 게 누구 때문인지 몰라?"
"몰라. 그냥 위험에 대비하는 거야. 유비무환이라고. 지금 이래도 내가 없으면 엄청 불안해질걸. 차라리 그럴 바에는 지금 떠나지 않는 게 어때..? 우산 빚진 것도 있잖아."
그는 고개를 돌리고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상당히 갈등하고 있었다. 여기서 뿌리쳤다면 나도 그의 뜻을 존중하고 포기했을 텐데도 가만히 있는 건, 역시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걸 인정한 거겠지. 이제 괜찮아. 떠날 일 없어. 사라질 일 없어. 안심이야.
"그냥 나와 함께 영원히 서있는 거야. 비를 맞지 않게 해 줄게. 우산 속으로 들어와."
그는 그렇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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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신을 떠안았지만 그래도 떠오른 건 있었다. 나는 떨리는 몸을 지금까지 바라보던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센이시 히치카와 : 모노키츠네, 재판을 휴정해 줘.
하나리 에린 : 반박 열심히 하다가 그게 무슨 말이야?
캡틴 유레이 : 휴정은 휴정이다만... 너무 갑작스럽군.
이런 반응을 우려했던 것이다. 하지만, 친구들의 반응은 별로 상관없다. 모노키츠네 본인의 의견이 중요하니까.
모노키츠네 : 갑자기 휴정이라니이이? 센이시 군, 뭔가 생각은 하고 말한 거겠지이이?
센이시 히치카와 : 나도 확신은 없어. 그냥 확인할 게 있어서 그래. 강당에 가 봤으면 좋겠는데...
모노키츠네 : 그걸 내가 왜 들어줘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네에에. 애초에 지금 한창 재밌었는데 이걸 들어주면 김이 팍 식는거어얼...
역시 안 되나... 예상은 했지만 이제 진짜 막막하다. 이 벼랑 위에서 내가 뭘 하면 좋을까... 하고 깜깜한 앞길을 비출 방법을 고민하던 그때.
??? : 오히려 그래서 들어줘야 하는 거야.
나는 그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그러자 전혀 예상 못한 인물과, 전혀 매치되지 않는 표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인물은 계속해서 설득을 이어갔다.
코이노 미노리 : 네 표현을 빌리자면, '한창 재밌었는데' 여기서 끊기면 김이 식는 거지? 지금 기억상실증은 거의 궁지에 몰린 상태야. 더는 써먹을 게 없거든. 그러면 이걸 들어주지 않으면 그냥저냥 논의가 사그라들어서 흐름이 끊기고 말겠지.
모노키츠네 : 으으음... 그래서어어?
코이노 미노리 : 반대로, 재판을 휴정하고 기억상실증이 확실히 해두고 싶은 것을 확인한다면? 오히려 재판의 분위기가 끌어올려질 수 있겠지.
모노키츠네 : 그것도 그런가아아아... 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음........
모노키츠네의 망설임이 길어졌다. 그 말은 어느 정도 설득되었다는... 뜻이었으면 좋겠다. 고민 끝에 허락을 받아내리라는 내 간절한 소망이 헛되게도, 직후 모노키츠네는 결심한 듯이 크게 외쳤다.
모노키츠네 : 확실히 학원장님은 크게 감동받았다고오오? 코이노 양의 말을 들으니까 골목길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는 걸 목격한 양 가슴이 두근두근 해져어어.
모노키츠네 : 난 결정해 버린 거야아아! 이렇게... 딱 하고 짠 하고 결정해 버린 거라구우우! 그럼... 학급재판을 잠시동안 휴정하겠습니다아아! 물론 휴정이니 한 10분 정도만 줄 거야아아. 0.01밀리 초라도 넘기면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오오?
나미유 카츠키 : 잠시만요. 그게 무슨 터무니없는... 학급재판 중에 갑자기 여길 벗어나겠다는 말을 저렇게 뻔뻔하게 하는데도! 그걸 들어주시면 어떡해요?
나미유가 이전과 달리 눈에 띄게 당황했다. 훌륭하게 먹혀들었다는 뜻이다!
센이시 히치카와 : 나미유, 넌 범인이 아니고 결백하다며? 그렇게 당황할 게 뭐 있어? 시간이 걱정인 거라면, 모노키츠네는 10분을 준다고 했지만 사실 10분도 안 걸리는걸. 그야 강당과 학급재판장은 무척 가깝잖아.
나미유 카츠키 : 읏..?! 하, 하지만... 하지만..! 역시 그건 안 돼요..! 규칙이라는 게 있는데..! 지금 나가서 강당에 뭐가 있는지 확인해 봤자 뭐가 된다는 거예요?! 전, 전 허락 못 해요..!
센이시 히치카와 : 방금 그건, 자백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지? 모노키츠네, 말을 번복해서 미안하지만 휴정은 없어도 되겠어.
모노키츠네 : 뭐라구우우?! 기껏 들어줬더니 나쁜 아이네에에. 뭐, 괜찮아아아! 나의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주지이이! 하던 거 마저 해애애.
센이시 히치카와 : 나미유, 다 끝났어. 어떡할래?
내가 나미유에게 다가가 슬쩍 속삭였는데도, 그녀는 응답이 없었다. 역시 체념한 걸까? 이 길고 길었던 이야기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희망을 품고 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나미유는 갑자기, 빠르게 고개를 들어 올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미유 카츠키 : 저는... 저는 인정 못 해요... 여기서 물러설 수 없다고요..! 죄다 억측이잖아요!!
센이시 히치카와 : 너도 인정할 수 있게, 이번 사건을 정리해 줄게. 그 후에는 제발 인정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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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하타미츠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퇴근하기로 한 것을 모두에게 알렸어. 오늘 4시에 시나하라와 에스티의 공연이 있을 예정이었으니까. 검정은 이를 듣고 검정이 내담자이기 때문에 알고 있던 하타미츠의 복숭아 알레르기를 이용해 그를 죽이기로 해.
모든 상담이 끝나고 하타미츠가 서류를 정리하고 있을 시각, 그리고 히네노야의 눈이 없을 시각인 3시, 검정은 그와 상담실에서 개별적으로 만나기로 했을 거야. 먼저 검정은 창고로 가. 스프링클러가 터졌을 때를 대비해 자신의 여벌 옷과 머리에 쓸 베일을 준비해 두고, 스프링클러에 걸려있는 로프를 아주 조심스럽게 회수했어. 로프는 대충 걸쳐 있으니까 조심만 하면 마찰이 생기지 않을 거야. 복숭아 시럽을 손에 붓고, 풀을 챙겨서 검정은 상담실로 가.
하타미츠는 홍차를 좋아하고 상담 때마다 마셨으니 검정도 어깨너머로 홍차 타는 법 정도는 알았을 거야. 검정은 자신이 홍차를 타겠다고 하고, 하타미츠의 컵 안에 복숭아 시럽을 발라둔 거겠지. 그리고 검정의 계획대로, 하타미츠는 그 컵에 담긴 홍차를 마시고... 숨이 끊어지고 말았어.
하타미츠가 죽는 과정에서 깨진 컵의 파편과 자신의 민감한 점이 담겨있을 상담 일지를 치운 후, 검정은 하타미츠의 손에 난 두드러기를 감추기 위해 풀로 손을 붙이고, 로프를 하타미츠의 목에 감았어. 검정 본인의 표현을 빌려 유동인구가 많은 개인실 앞쪽이니, 검정은 각별히 조심했을 거야.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검정은 하타미츠의 시체를 끌고 창고에 도달했어. 아무리 검정이 체구가 작다 해도, 하타미츠는 가벼운 데다 끌고 가는 거라면 어렵지 않았을 거야. 또, 하타미츠의 목에 사선으로 난 로프 자국은 이때 생긴 거야.
그리고 검정은 베일을 쓰고서, 로프를 문고리, 스프링클러, 하타미츠의 목 순으로 연결해. 이렇게 되면 문을 열었을 때 스프링클러에 마찰이 생겨 작동될 테니까. 장치를 설치한 후 검정은 그 자리에서 옷을 갈아입고, 베일과 젖은 옷을 입고 있는 옷 속에 숨겨 밖으로 나가.
마침 나온 검정을 후카바야시가 목격하고 검정이 젖어있지 않았다고 증언한 탓에 재판이 조금 혼란스러워졌었지만... 아무튼 모두 알듯이 시체가 발견되고, 조사시간이 되자마자 검정은 체육관으로 향해. 젖은 옷을 단상 위, 커튼 뒤에 숨기기 위해서지. 이후에도 검정은 체육관을 떠나지 않으며 옷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어. 그리고 현재에 이른 거야.
모두의 힘이 되었던 하타미츠를 죽이고, 필사적으로 거짓말했던 검정은...


역시 너인 거지? 초고교급 성직자, 나미유 카츠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