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늘하게 식은 방 안의 싸늘하게 식은 나무 의자에 앉아서 싸늘하게 식은 베개를 침대 위로 던진다. 감정은 원래 복합적인 것이라지만, 적어도 나에겐 포함되지 않는 말이다. 커터칼의 플라스틱 부분을 밀어 칼날을 빼냈다. 손목에 갖다 대는 데까진 성공했지만 용기 따위는 없어서, 피부에 느껴지는 것은 칼의 차가움 뿐이다.
그리고 들리는 노크 소리. 평소보다 더 빠른지 느린지 도저히 모르겠는 박자. 뭣 같은 기대감을 품고서 나는, 커터칼의 날을 넣는 것도 잊어버린 채로 방문을 열었다. 엄마가 앞치마의 매듭을 풀면서 손짓했다.
''디너아, 밥 먹어라.''
이제는 '먹다'라는 그 단어만 들어도 헛구역질이 올라올 지경이었다. 나는 속이 급속도로 역해지는 것을 참으며 문을 닫았다.
''안 먹어.''
서서히 좁아지는 문틈 사이로 엄마의 손이 불쑥 들어왔다. 문을 활짝 연 지 오래돼서 잘 작동하지 않는 경첩이 힘겹게 펼쳐졌다.
''디너아! 너 이래서 키보가미네 가겠니?''
''안 간다고 했잖아!''
''부모가 명문고 보내준다는데 감사한 줄도 모르고! 그래, 네 인생 네가 살아라. 커터칼 보니까 자해라도 했나 보지?''
나는 상처조차 없는 새하얀 손목을 반사적으로 가렸다. 딸이 자해한 것을 알고도 도움은커녕 키보가미네 타령만 하는 엄마가 미웠다. 기어코 다시 열린 문이 미웠다. 나는 엄마를 나에게서 밀어내듯이 문을 닫았다. 잠그는 것도 잊지 않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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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너아, 할아버지께서 편찮으시다구나. 병문안 가자.''
''...''
'할아버지'. 친할아버지인지 외할아버지인지 말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알았다. 외할아버지는 재작년에 돌아가셨으니까. 초고교급 미식가로 키우겠다고 부모님이 나에게 억지로 음식을 먹일 때마다 말려주셨던 분이었다. 반대로 친할아버지는 아빠보다도 나에게 음식 평가를 종용하며 그놈의 키보가미네에 집착했다. 나는 싫다는 말을 성대 밑으로 누르느라 애썼다. 하지만, 그 낌새를 아버지는 놓치지 않았다.
''또 싫다고 하려고? 에휴, 야. 과거는 바꿀 수 없어. 과거는 과거인 거야. 그냥 좀 무시하면 안 되겠니?''
''과거를... 바꿀 수 없다고?''
그럴지도 몰랐다. 내가 커서 초고교급이 되든 노숙자가 되든 할아버지가 나에게 억지로 무언가를 먹인 일은 변치 않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멍청했다. 무엇이든 다 반박하고 싶었다. 특히 과거에 관한 거라면.
''아니, 과거를 바꿀 거야.''
''뭐?''
''과거를 바꿀 거라고! 과거 그까짓 거 그런 과거가 존재했는지 모두가 잊을 정도로 내가 잘 되면 되잖아!''
''그러던지. 아무튼, 빨리 병원이나 가자. 할아버지가 기다린다.''
나는 겉옷을 걸치며 다시 다짐했다.
병원은 생각보다 넓었다. 미래 초고교급의 할아버지가 계시는 병원이니 넓어야 한다나 뭐래나 아빠가 입을 나불거렸지만, 초고교급이 될 생각조차 없다는 건 알기나 할까? 나는 발만 들여놓고 허리만 숙인 다음 병원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 병원의 바깥에 설치된 벤치에 앉았다. 그러다가... 깜빡 졸았던 것은 내 인생의 최고의 행운이자 불운이었다.
''누나?''
''으음... 나 동생 없는데...''
''누나! 일어나!''
눈을 뜨고 내가 처음 마주한 것은 주름이 불규칙적으로 잡혀서 역겨운 할아버지의 얼굴도, 음식을 들이미는 아빠의 얼굴도 아니었다. 새하얗고, 인생의 쓴 맛이라고는 처방되는 약밖에 경험한 적 없을 것 같은 작은 남자아이. 그는 마치 마당에 쌓인 눈을 바라보는 것처럼 포근했다.
''누나? 여긴 어쩐 일로?''
''꼬맹아, 난 네 누나가 아니야. 보아하니 이 병원에 입원한 애 같은데...''
''음... 어른들 말로는 패럼? 이라던가? 근데, 난 그런 복잡한 얘기 안 좋아해서 그냥 도망 나왔어!''
아마 그의 병명은 폐렴이겠지.
''누나, 나는 유키라고 해! 누나는 누구야?''
''나는... 이레나 디너아야.''
''우리 놀자, 디너아 누나!''
유키...라는 이름의 남자아이는 내 옆의 빈 곳에 앉았다. 그리고 나를 몇 초간 훑으며 빤히 쳐다보더니, 내 손목에 감은 붕대를 톡톡 쳤다. 상처가 없어 아프진 않았지만, 엄마와의 기억이 떠올라 속상했다.
''누나, 아파?''
''아니, 별로...''
''으음... 그럼 여기가 아픈가?''
유키는 그 이름처럼 새하얀 손으로 내 가슴 사이를 두드렸다. 딱 심장이 위치하는 곳이었다. 심장에 울림이 느껴졌다. 따뜻했다.
유키는 손을 한참 동안 내 심장 위에 올려두었다. 내심 유키가 손을 떼지 않기를 바라며 가만히 앉아있는데, 저 멀리서 유키의 머리색과 똑같은 머리의 여성이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듯이 뛰어왔다.
''유키! 한참 찾았잖아. 또 놀러 나온 거야?''
유키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여성은 유키의 손을 나에게서 떼어놓았다. 한순간에 심장 쪽이 차가워졌다. 유키의 어머니는 유키의 눈높이에 쭈그려 앉은 채 내 얼굴을 올려다보고는 허리를 기울였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저희 아이가 무례한 줄도 모르고 막 손을...''
아마 낯선 여자의 가슴에 손을 올리고서 가만히 있었다는 점이 마음에 걸리셨던 걸까?
''아닙니다. 괜찮아요.''
그리고, 잠시나마 온기를 되찾았던 내가 말했다.
''그냥, 유키를 다시 만날 기회가 왔으면 좋겠네요.''
''디너아 누나! 안녕-''
''유키! 들어가자! 죄송했습니다, 아가씨.''
그렇게 너와 나의 첫 만남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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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이 지난 후에도 그의 생각은 떠나지 않았다. 마치, 내 머릿속에 잠깐 머물렀다 가는 걸로 모자라 집을 짓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공사장엔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책상에 앉았다. 갖가지 필기구들을 노려보다가, 내가 집은 것은 커터칼이 아닌 연필이었다. 오래되어 가장자리가 누렇게 된 공책을 꺼냈다. 그리고 첫 번째 장에 내가 기억하는 대로 그 아이의 모습을 그렸다. 역시, 그림 실력이 썩 좋지는 못했다.
갈색 머리칼에 흰 피부. 커다랗고 검은 두 눈과, 그 속에서 빛나던 눈동자. 내가 기억했던 그의 모습은 그랬다.
따뜻한 손의 감촉을 기억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울렸다.
''엄마가 급히 나갔다 와야 하는데, 밥은 차려 놨으니까 먹어.''
''언제 들어올 건데?''
''지금이 8시니까... 2시쯤 들어올 것 같네. 미안.''
엄마에게 무슨 급한 일이 있는지는 잘 몰랐지만, 궁금하지도 않았다. 나에게 6시간의 자유 시간이 생겼다는 것은, 내 마음대로 행동해도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차려놨다는 밥은 먹은 척 싱크대에 버리고, 접시를 쌓아 대충 설거지했다. 반찬 수가 다양하기도 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집을 나서 병원으로 향했다. 다시 보고 싶었다. 그 순수함을 다시 보고 싶었다.
''유키야, 저 밖은 병원이 아니라서 못 나가. 우리 유키, 병 싹 낫고 나가자?''
''으응... 아쉬운데...''
그곳에는 내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그 아이가 있었다. 나는 그에게 한달음에 달려갔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어머, 저번에 그 아가씨 아니야? 볼일이라도 있어요..?''
''아니요, 그냥 유키 보고 싶어서 왔어요.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유키와 얘기 좀 해도 될까요?''
''아, 네. 그럼요. 어차피 놀아줄 사람이 필요했거든요.''
유키는 내 손을 잡고 뛰었다. 차마 어머니께 인사할 틈도 없었다. 어머니는 멀어져 가는 우리 둘 뒤로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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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키, 왜 갑자기 뛰었어? 넘어지면 어쩌려 그래.''
''그냥? 나도 몰라!''
''아무튼, 누나랑 수다 좀 떨까?''
유키는 고개를 끄덕이고선 내 옆에 가까이 붙어 앉았다. 대화 내용은 그냥 평범하고 일상적이었다. 평소 고민거리나 유키가 입원하게 된 계기, 그리고 키보가미네 학원. 나도 만난 지 일주일도 안 된, 몇 살은 더 어린아이에게 속 깊은 얘기까지 하는 건 어이가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유키는 의지가 되었다. 유키도 나를 그렇게 여기는 듯, 말을 술술 뱉어냈다.
그렇게 정신없이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새 2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엄마가 돌아오기로 한 시간. 내가 고작 어린애를 보러 집을 나갔다는 것을 알면 분명 또 화를 낼 게 뻔했다. 나는 황급히 휴대폰 액정에 적힌 시간을 확인하며 자리를 떠야 했다.
''유키, 누나가 지금 집에 가야 해서 그런데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놀자?''
''누나! 조금만 더 놀아..!''
''미안해, 유키. 다음에 또 올게! 그때까지 잘 있어야 한다?''
''누나! 가지 마..!''
나는 나에게 들러붙는 유키를 무시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제시간에 집에 도착할 수 없을 테니까. 어쩌면 이미 엄마가 집에 들어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유키, 잘 있어. 그리고 여긴 병원 아니니까 나오면 안 돼?''
나는 신호등이 빨간 불로 변하기 전에 건너기 위해서 횡단보도 위를 뛰었다.
''누나! 누ㄴ-''
그때였다.
쾅,
그 소리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지만, 나의 유일한 행복의 죽음을 그제야 깨달을 뿐, 급속도로 닥쳐오는 무력감에 항복하는 수 밖에는 없었다. 제발 꿈이기를, 일어난 일들이 없어지기를, 간절히 빌었지만. 과거는 바꿀 수 없다는 아버지의 말이 다 맞았다. 과거를 스스로 바꿀 거라던 바보 같은 내가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입꼬리를 따라 살짝 들뜬 광대 위로 따뜻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유키의 어머니께서 뒤늦게 뛰어왔다. 그리고 내 공허한 다크서클 위에 얹힌 동공과 손목에 휘감은 붕대, 그리고 흰색과 검은색이 반복되는 바닥 위에 맺힌 붉은색과 당황한 듯 떠나가는 자동차를 반복해서 바라보더니 소리쳤다.
''유... 유키야..!! 네 이 년... 유키랑 어쩐지 가까이 지낸다 했다! 다 네 때문이야! 네가 유키랑 친해지지만 않았어도..! 유키야..!!''
''아... 아니요... 저는...''
병원 관계자로 추정되는 사람이 하나둘 몰려들더니 바닥에 무참히 쓰러진 작은 아이와 그 몸 위에 빨갛게 적셔진 병원복을 보고 탄식했다. 그리고 하나둘 나를 비난했다. 차는 이미 지나간 지 오래이고, 나를 제외하면 유일한 목격자인 어머니가 나를 비난하고 있으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아니, 생각뿐이 아니라 정말 내 때문이었을 지도.
날 향한 온갖 삿대질이 날아왔다. 따가웠다. 슬펐다. 그렇지만 허무했다. 분노했다. 억울했다. 억울하면 뭐 할 건데, 다 네 탓이잖아, 나야.
주변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씩 뇌에 들어왔다. 모두 날 경멸하고 있구나. 난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으니까. 내 약간 뿌연 눈물의 색깔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해도 믿을 작정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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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장례식이 열렸다. 난 더 이상 흘릴 눈물조차 잃어버렸다. 감정이 없다 못해 마이너스였다. 안 그래도 검은 옷가지 속에 더 검은 마음이 자리하는 것 같았다.
''다 네 때문이야!''
그 말이 머릿속을 온통 뒤집어놓았다. 눈앞에서 울고 있는 목소리가, 내 귀에 생생했다.
마음을 비우려고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했다. 그런데 화장실로 향하는 동안에도 나를 향한 비난의 목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내가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수군대고, 나를 혐오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분명히 내 착각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도, 나에겐 그 착각이 현실이었다.
얼굴을 타고 흐르는 물이 세수하려고 적신 물일까, 눈물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죄책감일까? 죄책감이 흐르는 건 말이 안 되려나. 죄책감은 내 안에 있으니까. 비유가 아닌 것 같았다. 죄책감이라는 커다란 덩어리가 내 식도를 따라, 혈관을 따라, 내장을 따라 그 자리를 차지했다.
''제발... 나를 용서해 줘...''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세면대 앞 거울에 빨간색 액체가 온몸에 흐르는 남자아이가 어른거렸다.
''아니, 용서 안 할 거야. 누나 때문이잖아? 누나가 그때 나랑 더 안 놀아줘서 그런 거잖아? 누나가 그때 날 다시 보러 와서 그런 거잖아? 누나가 날 만나서 그런 거잖아? 안 그래, 누나?''
''아니야... 난 널 죽인 게 아니야...''
''그럼 뭐야? 난 죽었는데? 누나... 그만 인정해. 누나가 날 죽인 거야.''
''미안해... 아니... 하지만 나는... 널...''
''누나가 날 죽인 거야. 누나가 날 죽인 거야. 누나가 날 죽인 거야. 누나가 날 죽인 거야...''
''... 내가 널 죽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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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늘하게 식은 방 안의 싸늘하게 식은 나무 의자에 앉아서 싸늘하게 식은 베개를 침대 위로 던진다. 감정은 원래 복합적인 것이라지만, 나에게 감정은 사라져 있다. 커터칼의 플라스틱 부분을 밀어 칼날을 빼냈다. 손목에 갖다 댔다.
''그대로 그어버리는 거야, 누나... 이런 망한 인생 따위 포기하고 새로 시작하는 게 낫잖아... 안 그래?''
''그래... 이런 쓸데없는 인생 따위...''
똑똑-
''이레나, 있어?''
''아, 또 누구야? 누나, 무시해 버려. 내가 누나 부르면서 따라갈 때 누나가 나 무시했던 거처럼. 두 번째니까 잘할 수 있지?''
''아니... 그때랑은 다르잖아...''
나는 문을 열었다. 자꾸 옆에서 남자아이가 조잘대며 나를 흔들었지만, 내 눈앞에 있는 것은 남자아이가 아닌 니에류우 텐이었다.
''이레나. 잠시 나랑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아니... 혼자 할 일이 있어서.''
''아니... 혼자 할 일이 있어서.''
나도 왜 그렇게 말했는지는 몰랐다. 그저 뇌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어느새 내 성대는 남자아이의 편을 들었다.
''그래. 이레나, 그러면 잘 자고 내일 보자.''
''응, 그래.''
다시 의자에 앉았다.
''누나, 저 형도 죽여버리자. 방해되잖아. 누나 인생 누나가 그만두겠다는데. 왜 자꾸 방해야? 그냥 죽여버려. 두 번째잖아.''
''무슨 미친 소리야... 아무리 그래도 죄 없는 사람을 죽이면 안 돼.''
''아하- 나는 죄 있어서 죽었어?''
''그건 아니지만...''
''누나, 누나는 할 수 있어. 저 형 죽이고 학급재판에서 이기면 편하게 생을 마감할 수 있다고! 어때? 해 볼만 하지?''
''... 그래... 해 보자...''
나는 그렇게 사람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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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지나 하나시 : 잘 뒤져라, 쓰레기 살인자야.
이레나 디너아 : 잘 뒤져줄게. 나 쓰레기니까...
모노키츠네 : 처음 처형하는 거라 준비까지 1분 정도 시간이 있는데에에... 유언이라도 남겨어어. 자신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른다면 슬프지 않겠어어어?
이레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언'이라는 것을 무엇으로 할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이레나 디너아 : 나에게 유언 따위는 의미 없어. 그저... 너희들 모두, 오마지나처럼 날 쓰레기라고 평가하고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나에게도 그 편이 더 편하니까...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노키츠네 : 앗! 준비 다 됐다네? 작별 인사는 잘 마친 건지 모르겠다아. 그렇다면... 시자아아악!
모노키츠네가 자신 앞에 있는 커다란 빨간 버튼을 쾅 하고 눌렀다. 그다음은 그저 한 순간처럼 느껴졌다. 어디선가 튀어나온 쇠로 된 목줄이 이레나의 목을 감싸더니, 눈 깜짝할 새에 이레나와 함께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모노키츠네의 뒤편에 있는 스크린이 반짝 하고 켜졌다.
'최후미식회'... 아마 모노키츠네의 시선에선, 예술작품의 제목이라고 불러도 될 듯했다. 그 화면이 꺼지고 곧 어딘가로 정신없이 끌려가는 이레나의 모습을 비추었다. 목줄의 방향이 바뀌고, 이레나의 몸은 둥실 떠오른다. 그리고 순식간에 장소가 바뀐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웬 식당. 이레나는 커다란 식탁 앞에 앉는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 한 방울이 접시 위로 떨어지자, 이레나의 반대편 의자에서 모노키츠네가 튀어 오른다. 곧이어 모노키츠네 앞에 찬란한 스테이크 한 접시가 밀려들어온다. 스테이크의 주변에는 향긋하게 구워진 아스파라거스 조각들과 겨자와 섞인 소스가 나뒹굴고 있다.
모노키츠네는 군침을 흘리며 현란한 손동작으로 포크를 높이 들어 올린다. 포크의 끝 쪽, 네 갈래로 갈라진 부분이 스테이크의 중심을 향했다. 그러자 이레나의 머리 위로 모노키츠네의 것과 똑같이 생긴 대형 포크가 기계음과 함께 내려온다. 차가운 공기 속, 모노키츠네가 포크를 스테이크에 내리찍자, 대형 포크를 아슬아슬하게 매달고 있던 줄이 스르륵 풀린다. 그 포크의 끝이 향한 곳은 이레나의 머리. 이레나의 얼굴에 땀과 피가 섞여 흐르고, 이레나는 사색이 된다.
한편 모노키츠네는 스테이크를 썰지도 않고 통째로 우걱우걱 씹더니 뜯어내기가 질겼는지 뱉어내고는 포크를 뽑아버린다. 동시에 이레나의 머리에 박혀있던 대형 포크를 줄이 감아올리고, 식당 곳곳에 핏자국이 남겨진다. 그새 모노키츠네는 갑자기 탄성을 뱉고는 아까 찍었던 그 자리에 포크를 갖다 댄다. 모노키츠네의 발에 들린 작은 포크와 대형 포크 사이의 관계는 이레나가 머리 위에 뚫린 구멍으로 충분히 학습했기에, 이레나는 급히 저항해 보지만 모노키츠네를 막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결국 이레나의 상처는 깊어지고, 그녀의 착각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두개골에 충격이 가해지는 느낌까지 든다.
모노키츠네는 포크를 고기에 박아놓은 채로, 과도한 출혈에 몽롱해지듯 정신을 잃어가는 이레나의 눈앞에는 나이프를 들어 올리는 여우의 발이 존재한다. 이레나는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한다. 몸을 움직일 만한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으니까. 이레나는 죽음을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마지막 힘을 다해 손을 뻗는다. 그러지 마요. 제발... 하지만 그 진심은 모노키츠네에게는 닿지 못했는지, 대형 나이프가 이레나를 향해 추락하고... 곧 부드러운 스테이크가 나이프로 인해 육즙을 쏟아내며 썰린다. 모노키츠네는 스테이크를 음미하며 웃는다.
~THE END~
--
...
...
...
어째서일까.
화면 속 저 여자는 분명히 무고한 두 명의 목숨을 앗아갔는데도...
다시 살려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아까까지 살아 숨 쉬던 그 공기를 느낄 수 있는 건,
어째서일까.
피 묻은 접시와 화면 가장자리에 어렴풋이 보이는 머리가 여러 갈래... 사람의 형체.
그녀는 분명히 살인자이다. 동료를 죽였다.
그런데 저리도 무참하게 절망하며 죽음을 맞은 눈에서,
연민의 감정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어지러웠다.
토할 느낌도 들지 않았다. 차라리 게워내서라도 개운해진다면 다행일 텐데...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니에류우가 나라도 정신 차려야 한다고 말했잖아...
죽은 사람 말까지 배신할 거야?
죽은 사람..?
뭔가 중요한 것이 있었던 것 같은데...
죽은 사람. 죽은 사람...
죽은 사람의 영혼은 살아있는가?
센이시 히치카와 : 윽?!
나는 그 순간, 현실로 돌아왔다.
하타미츠 코지 : ... 여, 여러분... ㅈ, 잠시만 제 얘기를-
캡틴 유레이 : ... 하타미츠, 너무 '심리상담사'라는 직업에 부담감 갖지 않아도 돼. 이 일은 모두에게 충격적이야. 나도 괜찮은 척은 하지만 사실 너무 혼란스러워. 그러니까... 너도 그냥 쉬어. 개인실로 돌아가서 푹 자. 그게 나을 거야.
하타미츠 코지 : 가- 감사합니다...
사실 누구보다 혼란스러워 보이는 것은 하타미츠였다. 처음 입학식을 할 때도, 동기를 받았을 때도, 살인이 났을 때도 모두를 진정시킨 것은 하타미츠였으니까. 어쩌면 일을 너무 많이 한 것도 아닌가 싶었다.
한 편에는 차가운 사람들이 서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대화... 라기보단 싸움처럼 보이지만.
코이노 미노리 : 야. 아무리 이레나가 자기를 쓰레기라고 기억해 달랬지만 고인 능욕은 하지 말자. 최소한의 선은 지켜야지요, 응?
오마지나 하나시 : 아니, 쟤는 죽어도 싸. 살인자에게 살아있을 이유는 없어. 꼴 보기 좋더만. 죽음은 죽음으로 갚는다. 좋은 말이잖아?
코이노 미노리 : 얼씨구? 이 사람아. 사형 폐지된 나라도 많은 마당에 죽음은 죽음으로 갚는다? 이러고 앉았네. 사형 폐지된 나라는 살인마가 없어서 사형을 할 필요가 없었나 보다. 아하!
에스티 : 그만 좀 하지?
에스티가 잔뜩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 표정으로 둘 사이를 끼어들었다.
에스티 : 우린 서로를 의심했어. 이미 누구의 잘잘못을 따질 자격은 없는 거야. 물론 동료를 죽인 이레나의 잘못이 크지. 하지만 모노키츠네의 잘못이 더 크잖아! 헤쳐나갈 생각을 해야지 우리끼리 갈등만 더 커지면 안 돼.
코이노 미노리 : 춤꾼, 춤만 추는 게 아니었네. 빅동의.
에스티 : 춤꾼이 아니라 무용수... 그게 그거긴 한데.
오마지나 하나시 : 예예. 그래라. 내가 졌습니다. 앞으로 형씨들 나한테 관심 가지기만 해 봐. 앞으로 계속 난 없는 사람 취급하라 이거야.
후카바야시 츠이키 : 왜 그렇게 가는데, 이 빡대가리야.
슬슬 대화에 참여하는 인원이 늘어났다. 후카바야시가 오마지나보다 살짝 큰 체구로 오마지나를 내려보았다. 사고를 친 아이를 혼내는 부모 같았다.
오마지나 하나시 : 빡대가리라니? 본인이 나한테 할 소리야? 자, 왜 내가 빡대가리입니까?
후카바야시 츠이키 : 그야 혼자 다니면 존나 위험하잖아! 네가, 그, 그렇지. 그 살인 존나 극도로 혐오한다며? 근데 니 새끼가 혼자 다니면 살인이 날 가능성이 씨발 존나 오르잖아!
오마지나 하나시 : 그 '존나'는 빼놓고 말을 못 하나? 아무튼, 내가 살해당하지 않을 가능성은 염두에서 빼놓았네. 난 죽지 않을 거야. 그리고, 형씨들한테 신경도 안 쓸 거고요. 오케이?
오마지나가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 끝을 붙여 오케이 사인을 만들었다. 그리고 무심하게 검지손가락을 튕겨 후카바야시의 얼굴을 살짝 스쳤다. 내가 느끼기에는 각자의 방식으로 처형의 후유증을 잊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오마지나는 빼고. 그런데 그때, 모노키츠네가 모두를 재촉하며 소리쳤다.
모노키츠네 : 자, 자! 이제 올라갑시다아아. 제일 신나는 클라이맥스! 처형도 끝나버렸으니이이... 빨리 올라가아아. 여기 더 있어봤자 절망만 더 생길거어얼? 그러면 난 오히려 좋지마아안! 우뿌뿌!
우리는 모노키츠네의 말을 들어주기로 했다. 어차피 우리 모두 지친 상태였다. 휴식을 취하는 것이 그나마 진정하는 방법이었다.
우리는 엘리베이터에 탔다. 이제 들어올 때보다 세 명이 더 줄었나. 어제까지만 해도 세 명 모두 친하게 지냈을 텐데...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든 걸까?
나의 의문에도, 조금 비어 보이는 엘리베이터는 말을 하지 않았다. 소리를 낸 것은 도착했다는 것을 알리는 띵 소리뿐이었다.
1챕터 - 무한대의 도미노도 무너지는 건 순식간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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