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렇게 우리는 어찌어찌하다 보니 대욕탕에 다다라 있었다. 날 보는 셋의 시선이 무척이나 따가웠지만... 진짜 그렇고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니니까 잘 해명하면 괜찮을 것이다. 들어가기 전까지는 모노키츠네의 시선 안에 있으니, 일단 들어가서 천천히 설명하자.
그 커다란 문을 다시 열고서, 그 익숙한 탈의실을 다시 보게 되었다. 대욕탕 안쪽에서 여자애들의 수다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넷은 일단 중앙의 커다란 의자에 앉았다.
에스티 : 센이시, 너라면 이유는 있을 거라 생각한다. 들려줘.
센이시 히치카와 : 일단, 진짜 훔쳐보려고 온 건 당연히 아니니까 다들 표정 좀 풀어. 너무 험악해.
신마에는 항상 하던 그 겁먹은 표정 그대로였지만, 유레이나 에스티 같은 경우에는 평소보다 표정이 많이 일그러져 있었다. 유레이는 얼굴 안면 근육을 풀어보려고 어떻게든 용쓰더니 억지웃음을 짓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센이시 히치카와 : 아무래도, 모노키츠네가 우리가 중요한 사실을 알아냈다는 걸 눈치챈 것 같아. 모노키츠네가 굳이 등장해서 몹쓸 농담을 한 것도 경계하고 있다는 걸 돌려 말한 걸 거야.
센이시 히치카와 : 일단이라도 그 상황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모노키츠네의 경계는 계속될 거야. 그래서 그 몹쓸 농담을 받아주는 게 그나마 나았던 선택이었던 거지.
캡틴 유레이 : 그래서, 일단 오긴 왔는데 이제 어떡해? 애들 나오기 전에 다시 나갈까?
물론 자신들이 목욕하는데 이성들이 탈의실까지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좀 낭패겠지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해명하면 그만인 일이고, 다시 강조하지만 나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
센이시 히치카와 : 일단 훔쳐볼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어. 난 마침 여기로 모인 김에 애들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지금까지 알아낸 걸 공유도 할 겸 얘기해 볼 생각이야.
신마에 히요리 : 그럴 거라면 토라시나 오마지나도 있는 편이...
캡틴 유레이 : 오마지나가 부른다고 예, 하고 올 것 같아? 토라시는... 컨디션이 많이 나쁜 것 같으니까 일단 놔두자.
신마에 히요리 : 으, 으응... 미안해...
캡틴 유레이 : 아냐, 네가 뭘 잘못한 게 있다고.
거듭 사과하는 신마에에게, 유레이는 진심으로 당황스러운 듯이 손을 떨면서 신마에의 등을 토닥였다. 신마에는 언제나 느끼지만 정말 자존감이 낮구나...라는, 별로 좋지는 않은 생각을 속으로 삼켰다.
그렇게 하염없이 좀 기다리다 보니, 결국 때는 오고야 말았다.
하나리 에린 : 캬아~! 기분 좀 별로였는데 역시 목욕하고 나니까 개운하-
커다란 수건을 몸에 칭칭 두르고서, 기지개를 쫙 켜며 탈의실로 나오는 하나리와 눈이 딱 마주친 것이었다. 하나리는 날 비롯한 남자들을 보자마자 차마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따라서 나오던 시나하라의 등 뒤로 숨어버렸다.
시나하라 아쿠아 : 뭐, 뭐야..?! 너희가 왜 여기...
히네노야 나오미 : 꺄아아아악?! 자, 잠깐만! 난 수건 위에는 안 둘렀다고! 빨리 눈 감아, 이것들아!
후카바야시 츠이키 : 응? 뭔데?
히네노야 나오미 : 후, 후카바야시! 빨리 가려..!
그렇게 우리는 기묘한 분위기 속 대치하게 되었다. 히네노야를 제외한 여자애들은 모두 큰 수건을 흉통 앞부분을 감싸서 뒤로 넘긴 후, 뒤에서 묶은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모두들 잘 가려지지 않은 뒤쪽만큼은 사수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 이후는, 예상 못 한 건 아니지만, 나는 해명할 시간도 주어지지 않은 채 그 혼란 속에서 잠자코 앉아있어야 했다. 해명할 타이밍을 단단히 놓쳤기 때문에, 여자애들의 비난은 덤으로 얹어져 왔다. 그 사이에서, 독보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코이노 미노리 : 뭐, 크게 놀랄 것도 아니지 않아? 그 나잇대 남자애들이 다 그렇지.
어느 정도 원성이 가라앉은 후 뒤늦게 나온 코이노가 한 마디를 툭 뱉었다. 딱히 해명이 될만한 말은 아니었지만 일단 흐름은 끊겼으므로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코이노까지 이 목욕 모임에 참가한 것은 예상외였다.
하나리 에린 : 이게 크게 놀랄 사안이 아니면 뭐란 말이야..?!
코이노 미노리 : 사람 말 끝까지 들어. 얘네들은 예외인 것 같다고 말하려 했어.
시나하라 아쿠아 : 예외..? 변태짓 하려고 온 게 아니야?
코이노 미노리 : 사실 표정부터 티 나긴 하는데,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는 문제야. 진짜 엿보려고 온 거면 우리가 아예 씻고 있을 때 보지, 여기서 얌전히 앉아서 기다리냐?
히네노야 나오미 : 뭐, 그건... 그렇네.
코이노의 말에, 다들 어느 정도 납득한 눈치였다. 코이노의 능력은 이럴 때만 도움이 되는 것 같다니까. 결국은 나에게는 좋게 작용했긴 하지만.
센이시 히치카와 : 미안, 당황했지? 사정이 좀 있었어. 물론 잘한 짓은 아니겠지만... 일단 옷부터 입고 얘기하자.
에스티 : 그럼 우리는 그동안 어디에 있어야 하지?
센이시 히치카와 : 여기서 밖으로 나가도 의미가 없을 거야. 탕 쪽으로 가 있는 게 좋겠어.
후카바야시 츠이키 : 그건 왜 그런 거야?
센이시 히치카와 : 여기 오게 된 사정과 좀 연결되는 문제야. 나중에 얘기해 줄게.
남자들은 여자들이 옷을 입을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어야 했다. 나는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마음속으로 정리하며, 나머지 남자들을 데리고 욕탕으로 들어갔다. 역시 방금 썼기 때문인지 공기가 뿌옇게 되어있었고, 뜨거운 수증기가 내 정면으로 들이닥쳐서 한동안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조금 기다리고 있자니, 여자애들이 샤워하는 데 썼을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물이 유독 많이 묻어있는 걸로 봐서 확실했다. 그런데, 거기서 하나 이변이 보였다. 나는 바로 가까이 다가가서 그 정체를 확인했다.
캡틴 유레이 : 센이시, 어디 가?
센이시 히치카와 : 여기 뭔가 있어서. 아마 놓고 간 것 같은데...
물에 젖어있지만 여전히 빛나고 있는 그것은 놀랍게도 펜던트였다. 하지만 보통의 펜던트와 달리 경첩이 달려있어 열리는 구조였다. 누구의 것인지 알기 위해 슬쩍 열어보니 웬 사진이 하나 들어있었다. 그 사진 밑에는 작게 한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그것을 무심코 소리 내어 읽었다.
센이시 히치카와 : '○○중 배구부 영원히'...
신마에 히요리 : 배구부라면... 후카바야시 건가 봐.
센이시 히치카와 : 사진은 친구들이랑 찍은 것 같네. 중학교 때 후카바야시는 머리가 길었구나.
나는 펜던트를 닫았다. 더 봐봤자 딱히 이득이 될 것도 없고, 애초에 남의 걸 허락 없이 막 본다는 게 좋은 건 아니니까. 그때, 바깥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나리 에린 : 얘들아! 우리 다 입었어!
에스티 : 좋아, 나가자.
우리는 다시 탈의실 쪽으로 향했다. 다들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머리를 땋지 않은 시나하라를 제외한다면. 나는 펜던트는 나중에 돌려주기로 하고 일단 여자애들 앞에 섰다.
센이시 히치카와 : 일단... 다시 한번 미안해. 내 입장에선 최선의 선택이었어.
코이노 미노리 : 사과는 됐으니까 할 말이나 해.
센이시 히치카와 : 응, 고마워.
나는 설명을 시작했다. 말 한마디 마디 자체는 아까 남자애들에게 설명했던 것과 거의 유사했지만, 여자애들은 모노키츠네가 우리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 모르기에 더 많은 설명이 필요했다. 말이 끝나자, 여자애들도 이해해 주는 것 같았기에 나는 안심했다.
시나하라 아쿠아 : 모노키츠네도 참, 그런 농담이나 해대고...
센이시 히치카와 : 뭐, 그것도 우리에 대한 경계를 돌려 말한 거라고 생각되니까...
신마에 히요리 : 그렇게 생각하면 다 설명이 되긴 하지... 그런데 센이시, 모두랑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나는 신마에의 말 덕분에 내가 현재 할 일이 무엇인지 기억해 냈다. 내가 할 일은 현재 알아낸 걸 공유하고 앞으로의 일을 모두와 논의하는 것. 그것밖에 없으니 더 많은 발자국을 나아가서 볼 필요는 없다... 고 생각하는 것만이 나의 최선이었다. 우선은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하자.
센이시 히치카와 : 그래. 일단 너희와 현재까지의 진전을 공유하고 싶어서.
히네노야 나오미 : 진전...이라면?
센이시 히치카와 : 감시카메라 얘기야. 지금 우리가 있는 이 탈의실에는 감시카메라가 없어.
말이 떨어지자, 조사 성과를 공유할 때 없었던 하나리와 후카바야시가 놀란 듯 입으로 숨을 삼켰다. 그 자리에 없었던 건 코이노도 마찬가지긴 했지만, 코이노는 이미 알고 있었을뿐더러 우리에게 그 사실을 알려준 장본인이기에 표정이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나는 말을 계속했다.
센이시 히치카와 : 그래서 말인데, 정말 필요한 회의를 할 때는 여기서 할 거야. 물론 너무 자주 드나들면 들킬 위험이 있으니까 가끔씩만.
하나리 에린 : 헤에, 꽤 많이 나아간 기분이 드는걸. 정리도 깔끔하고. 역시 리더!
하나리가 날 추켜세우자 조금 쑥스러워졌다. 나는 손사래를 치면서 말리지 않으면 어디까지고 칭찬만 늘어놓을 기세인 하나리를 멈추게 했다. 그러자 하나리는 가까스로 원래 하려던 이야기로 돌아왔다.
하나리 에린 : 근데 지금 건 여기 없는 애들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꽤 중요한 얘기 같은데.
캡틴 유레이 : 토라시는 컨디션이 많이 나쁜 것 같고, 오마지나는 어디 있는지조차 모르겠어서 일단 개인 채팅으로는 보내놨어. 읽었을지는 모르겠네.
코이노 미노리 : 그래도 다행이네. 너네가 내 말의 의도를 모르면 어쩌나 생각했었어. 기억상실증, 네가 발견한 거지?
코이노가 팔짱을 끼고 날 가리키며 말했다. 날 높게 평가하는 건, 특히 코이노가 그러는 건 좋지만 이 성과의 주인은 내가 아니었으므로 나는 부정의 의사를 나타냈다. 코이노는 조금 놀란 듯하다가도 얼마 안 가 수긍했다.
센이시 히치카와 : 중요한 회의를 여기서 하자는 건 확실히 내 아이디어가 맞지만, 감시카메라가 없다는 것 자체는 신마에가 찾아냈어.
신마에 히요리 : 에... 에..? 으으... 그렇긴 한데...
신마에는 자신에게 몰리는 시선이 신경 쓰이는지 몸을 사방으로 배배 뒤틀며 꾸물거렸다. 나는 신마에가 부담스러워하는 걸 눈치채고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센이시 히치카와 : 크흠, 아무튼, 하나리와 후카바야시는 안 가봤겠지만 3층이 열렸어. 그 외에도 지금 있는 대욕탕이라던지 보건실도 열렸고. 하나리, 힘들겠지만 이번에도 지도를 좀 부탁할 수 있을까?
하나리 에린 : 맡겨만 줘! 아쿠아 쨩이 3층에 디자이너 연구교실이 있다고 해서 어차피 가볼 예정이었어.
시나하라 아쿠아 : 하나리, 넌 미술실도 좋아할 것 같아. 괜찮으면 같이 가자.
하나리 에린 : 너무 좋아! 아쿠아 쨩, 고마워~
어제의 끔찍한 일에도 불구하고, 둘은 평소와 같았다. 오히려 분위기를 띄워주기 위해서 하나리가 억지로 텐션을 높인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보기에는 편안했다. 그 와중에, 나는 슬슬 타임 업이 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물론 그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에스티 : 그런데, 괜찮아? 모노키츠네가 의심할 때가 된 것 같은데. 나가는 게 어떨까?
히네노야 나오미 : 나도 그렇게 생각하던 참이었어. 그럼-
그때, 에스티가 그대로 등을 돌려 나가려는 히네노야의 손목을 낚아챘다. 히네노야는 깜짝 놀라 상반신의 방향을 홱 틀었고, 그 바람에 에스티와 마주 보게 되었다.
에스티 : 어, 에, 음... 아, 미안해..! 나도 모르게...
히네노야 나오미 : 아니, 난 괜찮은데... 갑자기 왜 그래?
에스티 : 아, 별 건 아닌데... 애초에 남자들이 여기 온 이유가 여자들을 훔쳐보는 걸로 연기하려고 그런 거잖아? 그러면 나갈 때도 연기하면서 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에스티의 의견은 확실히 핵심을 찔렀다. 나로선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부분인데, 에스티의 발언 덕분에 위험이 줄어든 것이다.
후카바야시 츠이키 : 확실히, 여기서 갑자기 화목하게 나가면 다 포수로 돌아가긴 하겠네.
신마에 히요리 : 저기, 후카바야시... 포수가 아니라 수포...
후카바야시 츠이키 : 뭐가 어찌 됐든 간에. 상황 설정을 하자.
우리는 다 같이 멈춰 서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여기로 들어오기 이전에 연기한 대로라면, 모노키츠네의 말을 듣고 솔깃한 남자들이 여자들을 훔쳐보러 들어간다. 한창 훔쳐보던 남자들은 여자들이 목욕을 마치려는 걸 보고 급히 도망친다... 정도면 적절한 대본이 될까? 나는 답을 얻기 위해 모두에게 이 시나리오를 전했다.
캡틴 유레이 : 나는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이대로면 후에 여자들과 남자들이 평소처럼 화목하게 지내도 이상하지 않고.
에스티 : 그럼 남자들이 먼저 나가야겠네?
시나하라 아쿠아 : 아무래도 그렇겠지.
신마에 히요리 : 그럼, 우리는 식당에 가 있을게...
그렇게 남자들은 탈의실 밖으로 나가려고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내 방향은 다른 쪽이었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구석에서, 나는 주머니에 넣어둔 펜던트를 꺼냈다.
센이시 히치카와 : 후카바야시, 네 거 맞지? 아까 대욕탕에서 찾았어.
후카바야시 츠이키 : ..!
센이시 히치카와 : 아, 물론 조금 열어본 건 미안해. 누구 거인지 알려고 그랬어.
후카바야시 츠이키 : 고, 고마워... 이거, 나한테 소중한 건데...
후카바야시는 평소에 내가 생각했던 그녀의 털털하고 솔직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눈에 띄게 동요하며 내가 건넨 펜던트를 가져갔다. 그리고 그걸 그대로 품에 안고서 눈을 감아버렸다. 친구들과의 우정을 상징하는 물품이면 저렇게 반응할 만도 하다. 심지어 이 건물에 갇혀서 나갈 수 없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나는 어느새 사라진 나머지 남자애들을 쫓아가기 위해 급히 뛰어서 탈의실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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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리는 왠지 모르게 들떠서 3층으로 올라왔다. 그녀의 옆쪽에는 시나하라도 있었다. 시나하라도 오늘 처음 3층에 발을 디딘 건 마찬가지였지만, 자신보다 3층에 대해 지식이 없는 하나리에게 있어서는 가이드와 같은 존재였다.
하나리 에린 : 아쿠아 쨩, 잘 부탁해.
시나하라 아쿠아 : 다른 애들이 맡은 곳도 있으니까, 나도 그다지 잘 아는 건 아냐. 그래도, 들은 걸 토대로 최대한 설명해 줄게.
하나리 에린 : 호오... 3층은 대충 이렇게 생겼구나. 2층이랑 비슷하네. 다른 점이면, 그 큰 기둥이 없다는 정도?
하나리는 외투를 걸치며 주위를 한 번 빙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항상 가지고 다니던 메모장을 들었다. 하나리는 우선 큰 사각형을 그리고서, 일단은 메모장을 덮었다.
시나하라 아쿠아 : 그럼, 어디부터 가 볼래?
하나리 에린: 난... 미술실부터 갈래.
시나하라 아쿠아 : 응? 좀 의외네. 당연히 연구교실부터 갈 줄 알았는데.
하나리 에린 : 원래 메인디시는 마지막이지!
시나하라 아쿠아 : 일단 알겠어. 미술실은 이 쪽이야.
시나하라는 하나리를 미술실로 안내했다. 하나리는 미술실에 들어서자마자 금세 얼굴이 환해졌다. 보이는 풍경은 센이시와 에스티가 본 그대로였지만.
하나리 에린 : 뭐, 뭐야..?! 엄청 화려한데..?!
시나하라 아쿠아 : 나도 직접 와 보긴 처음인데... 눈이 좀 아픈걸.
하나리 에린 : 썩 세련된 건 아니지만 내가 어릴 때 그리던 거랑 비슷한 감각이라 좋다. 감성적인 울림을 준달까.
모노키츠네 : 역시 하나리 양은 미적 감각이 훌륭하네에에. 사실 다 내가 그린 거거드으은!
하나리 에린 : 엑.
하나리는 갑자기 나타난 모노키츠네에 미간을 급속도로 찡그렸다. 모노키츠네의 말속 내용도 한몫을 했다. 하나리 본인이 방금까지 극찬하던 그림 뭉치가 모노키츠네의 것이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모노키츠네는 한 마디만 하고 사라졌다.
하나리 에린 : 뭐... 저딴 그림은 됐고. 뭐가 있는지 좀 봐야-
시나하라 아쿠아 : 하나리.
하나리 에린 : 응?
하나리가 불린 자신의 이름에 뒤를 돌아보자, 시나하라는 아까까지의 모습을 잊게 될 정도로 정색하고 있었다. 뭔가 심각함을 느낀 하나리는 잠깐의 망설임 후 반응했다.
하나리 에린 : ... 뭔데?
시나하라 아쿠아 : 최근에 뭐 고민거리라도 있어?
하나리 에린 : ... 아쿠아 쨩도 참, 어떻게 없겠어.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
시나하라 아쿠아 : 그것만 있는 거 아니잖아.
하나리 에린 : 하여튼 예리하긴...
하나리는 말을 잠시 멈추고 좀 뜸을 들였다. 그리고 시나하라에게 바짝 다가가 상반신이 거의 맞닿은 상태가 되었다. 하나리는 무서운 표정을 짓고서 시나하라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눈동자에는 빛이 한 톨도 깃들어있지 않았다. 완벽하게 어둠만을 지닌 눈을 한 채, 하나리는 입을 열었다.
하나리 에린 : 나중에. 개인실 가서 얘기해.
시나하라 아쿠아 : ..!
하나리 에린 : 아하핫, 조사나 마저 하자?
시나하라 아쿠아 : ... 알았어.
하나리는 급속도로 시나하라에게서 떨어져서 미술실을 한 바퀴 돌았다. 하나리가 특히 관심 있어 한 것은 석고상 두 개였다.
하나리 에린 : 우왓..! 창이다..!
시나하라 아쿠아 : 하나리... 그거 모형이래. 그래도 웬만하면 건들지 마.
하나리 에린 :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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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정말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어제에 비하면 당연히 비교도 하기 힘들 정도로 적은 일이겠지만 3층을 비롯해 새로 열린 장소들에 대한 조사부터 탈의실에서 있던 일까지, 나에게는 조금 버거운 하루였다. 시간도 늦었고 피곤하기도 해서, 심야시간이 된 건 아니지만 나는 개인실로 들어가기로 했다.
문을 열고 개인실에 들어서니 문득 많은 생각이 내 뇌를 스쳐 지나갔다. 니에류우, 타라, 이레나, 하타미츠, 나미유의 얼굴과 목소리가 한 번씩 내 각막과 달팽이관을 두드리며 내 속으로 들여보내달라고 재촉했다. 그에 더해 미쳐버린 타이밍으로, 머릿속에서 비명을 지르듯이 고통을 온몸으로 보내왔다. 뇌내에서 얽히듯 터져 나온 통증은 내 정신을 끈적하게 감싸고서 어떠한 감정을 신경으로 흘렸다. 그 감정의 이름, 너무나도 잘 아는 그 이름은. 절망.
쉽게 말해, 두통이었다. 두통 자체는 지금까지 매일 겪던 거라 괜찮았다. 지금까지의 어떤 것보다도 심하다는 게 문제였지만.
나는 머리를 감싸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눈으로 들어오는 빛과 귀로 들어오는 소리를 차단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해 눈을 질끈 감고 귀를 막았다.
제발. 내버려 둬. 너네는 이런 사람이 아님을 난 알아. 너무나도 잘 아니까 더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난 잘못한 게 없잖아.
하지만 이미 안으로 들어온 검은 기억들은 뇌를 헤집어놓고 뛰어다녔다. 다른 말로 어긋난 죄책감이라고 표현하면 적합할까. 내 과실은 없음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구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말아서, 제대로 판단이 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이 세상을 떴다. 아직도 내 뇌 한편에서 살아있는 것 같은데도. 그들의 형체는 이미 아득히 멀어졌음을 실감할 때마다 걷잡을 수 없이 두통이 밀려온다.
내가 그 순간 해낸 최소한의 이성적인 판단은 저번에 보건실에서 가져와 먹고 남은 두통약이었다. 나는 힘없이 축 늘어진 몸으로 겨우 기어서 서랍으로 가려고 했다. 서랍은 더럽게도 높았다. 젠장. 이대로면 누구나 쉽게 예측할 수 있듯이 그대로 바닥에서 의식을 잃을 거다.
그러다, 결국 힘이 다했다. 흐려지는 시선 속에서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며 신음하고, 비명을 지르고, 신음하는 일을 반복하며 차갑게 눈을 감아갔다. 겨우 잡고 있던 의식의 끈을 완전히 놓아버리고서. 문을 닫았기에 아무도 그 꼴을 보지 못한 건 다행이었다.
이런 때에도 남 시선이나 의식하다니, 한심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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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키츠네 : 인간은 언제나 참 형편없어어어. 자신이 항상 잘났다고 생각하면서 언젠가는 또 자신이 제일 실패작이라고 생각하잖아아아. 가끔은 자기들끼리 멋대로 정해서 지구 최고의 사람이 되기도 하고오오. 그래도 한심하게 침대를 내버려 두고 바닥에서 자지는 말자고오오! 아침이 밝았습니다아아! 모두들 즐거운 살인학급생활 되세요오오.
센이시 히치카와 : 아...
아침에 눈을 떠버렸을 때는 문 앞에 쓰러져 있는 상태였다. 나는 아직도 미미하게 남아있는 두통 덕분에 조금이나마 내 상태와 상황을 파악했다.
센이시 히치카와 : 나... 개인실에 들어오자마자... 쓰러졌나...
모노키츠네 : 그러게 말이야아아. 센이시 군, 너무 병약한 거 아냐아아?
센이시 히치카와 : 아... 아무도 안 봤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있었구나.
모노키츠네 : 센이시 군이 죽어버리면 어쩌나 싶어서 아침 방송으로 센이시 군 얘기 좀 해봤어어어. 그야, 센이시 군이 죽으면 재판이 재미가 없는거어얼.
나는 잘 움직이지 않는 관절을 삐걱대며 움직여 일어섰다. 지금쯤이면 식당에서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문을 겨우겨우 열고서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식당까지 가는 길은 너무 멀었다. 그리고 또 남들이 걱정할까 봐 한껏 웃으며 들어갔다. 내가 생각해도 위선적이고 어색한 웃음이었지만 모두에게 피해를 끼치기는 싫었다.
센이시 히치카와 : 안녕, 얘들아.
에스티 : 안녕, 센이시. 잘 잤어?
센이시 히치카와 : 상황이 상황이니 잘 잔 것 같지는 않고, 그냥 그럭저럭 잤어.
시나하라 아쿠아 : 다, 다행이네.
시나하라는 평소처럼 말했지만 어딘가 두려워 보였다. 나 자신부터가 내 상태에 대해 두려우니까, 시나하라도 그런 거겠지. 나는 크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자리에 앉았다. 솔직히 말하면 절대 뭔가를 먹을 컨디션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