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통이었다.
그 차가운 길바닥에서 식어가던 일도,
먹을 걸 찾아 쓰레기통을 뒤지던 일도,
남들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작은 돈이라도 만져보려 애썼던 일도,
남들의 안쓰러움과 혐오감 섞인 눈빛을 버텨내던 일도,
남들이 던지는 쓰레기를 온몸으로 받아내던 일도,
다 찢어져가는 옷의 구멍을 필사적으로 가리던 일도,
엄마와 아빠의 이름을 목이 찢어지도록 외치던 일도.
고통이었다.
그 시간을 난 기어코 버텨낼 수가 없어서, 하염없이 울부짖었다.
울부짖고, 울부짖고, 울부짖고 나서야.
끝났다.
그리고 시작되었다. 모든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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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접시도 없이 그저 자리에 앉아있기만 하자, 친구들이 나에게 다가왔다. 남을 걱정시키는 건 최고로 싫은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음식을 욱여넣는 것은 더욱더 최악이었다.
센이시 히치카와 : 미안. 오늘은 왠지 입맛이 없어서.
후카바야시 츠이키 : 좀 쉬어야 하는 거 아냐?
센이시 히치카와 : 아냐. 그렇게 심한 건 아니고 그냥 컨디션이 좀 안 좋은 거니까.
솔직히 컨디션이 좀 안 좋은 수준이 아니라 매우 나쁜 거였지만, 모두를 안심시키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거짓말하는 것도 좋은 건 아니지만.
토라시 치사토루 : 그, 그래서... 오늘은 어쩔 거야?
센이시 히치카와 : 토라시? 괜찮아? 어제 좋지 않았잖아.
토라시 치사토루 : 솔직히 완전히 괜찮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오긴 와야 할 거 아냐.
히네노야 나오미 : 토라시, 표준어 쓰네?
토라시 치사토루 : 음, 좀... 어색하다면 미안하지만, 도저히 사투리를 쓸만한 기분이 아니라서...
사투리를 쓰는 데 쓸만한 기분까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편안한 상태일 때만 사투리를 쓰는 걸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확실한 건 어제 토라시와 연관이 있는 거겠지. 분명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였으니까. 마음대로 추측하는 건 좋지 않지만, 토라시는 과학실에 안 좋은 기억이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또다시 3층을 조사하자는 건 좋은 선택은 아니겠지.
센이시 히치카와 : 그럼, 오늘은 어떻게 하고 싶은지 말해 볼래?
평범한, 하루의 시작을 여는 멘트가 되었을 터였다. 원래라면 거기서 여러 가지 의견이 오가고, 다음 행동과 행선지를 정해 각자 움직이고. 그래야 했을 터였다. 갑작스레 그것이 시작되지만 않았더라면.
모노키츠네 : 난 동기 발표할래애애!!!
신마에 히요리 : 으아아아아..! 도, 동기..!
동기라면... 첫 번째는 동기 비디오, 두 번째는 비밀이었나. 첫 번째 사건 때는 몰라도 두 번째 사건 때 우리는 동기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깨달았다. 잘 지내고 있던 나미유도 동기가 나오고 나서 잘 억누르던 이중인격이 되살아나 그런 끔찍한 일을 일으킨 것이니까.
모노키츠네 : 솔직히 동기를 발표할 정도로 상황이 정체된 건 아니지마아아안... 이번 동기는 솔직히 전 것들에 비해 좀 약한 것 같아서 그냥 빨리 발표해 버릴게에에. 그럼,
모노키츠네는 잠시 사라지더니 다른 곳에서 나타났다. 그곳은 바로 모니터 속이었다.
모노키츠네 : 아- 아- 학생 전원은 지금 즉시 식당으로 모여주세요오오.
모노키츠네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식탁 위에서 나타났다. 단독 행동을 하던 코이노와 오마지나까지 식당으로 도착하자, 모노키츠네는 저번처럼 빙글빙글 돌며 멋진 척을 했다.
모노키츠네 : 자, 자, 동기 발표 시간입니다아아! 지체하지 않고 당장 발표해 버리자아아!
코이노 미노리 : 첫 번째와 두 번째에 다른 동기를 줬으니, 이번에도 그딴 비디오나 쪽지는 아니겠지?
모노키츠네 : 당연하지, 같은 걸 두 번 하면 질리잖아아아. 그래서, 이번에느으은...
모노키츠네는 갑자기 뒤에 숨기고 있던 커다란 서류가방을 꺼내더니 내용물을 식탁에 쏟아부었다. 그 정체는 다름 아닌...
하나리 에린 : 도, 돈..?!
모노키츠네 : 바로바로~ 백억 엔이야아아!!!
백억 엔..?! 솔직히 잘 감이 안 오는 수치인데, 식탁에 오른 엄청난 양의 돈을 보니 실감이 조금 났다. 엄청나게 많은 돈. 말 그대로 엄청나게 많았다. 그래도 조금 의문은 드는 것이, 누가 돈 때문에 살인까지 한다는 말인가. 그것도 우리는 초고교급인데.
후카바야시 츠이키 : 아, 아무리 그래도 누가 돈 때문에...
오마지나 하나시 : 무식한 녀석아, 범죄자의 동기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게 돈인 거 몰라?
에스티 : 솔직히 말해서, 나는 집안 형편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들 초고교급들인데 남 부럽지 않을 정도로 벌어두지 않았을까?
식당 전체에 혼란만이 오가는 가운데, 시나하라가 그녀답지 않게 꽤나 정색한 표정으로 상황을 갑자기 잘라내 버렸다.
시나하라 아쿠아 : ... 모르겠어. 일단, 모노키츠네가 더 할 말 있는 것 같은데.
모노키츠네 : 고마워, 시나하라 야아아앙.
모노키츠네는 그 많은 돈을 다시 서류가방에 쓸어 담은 뒤, 안에 든 게 너무 많아서 잔뜩 빵빵해진 가방을 겨우겨우 닫아냈다. 그리고 한편에 대충 던져놓은 후, 말을 계속했다.
모노키츠네 : 이번에도 추가 동기까지 한 번에 발표할 거야아아! 바로바로...
모노키츠네는 동그란 발로 식탁을 두드리며 긴장감을 올리는 행동을 취했으나 별로 긴장이 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모노키츠네는 머쓱해하며 그만뒀다.
모노키츠네 : 공범과 운명공동체가 되는 거야!
캡틴 유레이 : '운명공동체'..? 워딩부터 좋은 예감은 안 드는데.
오마지나 하나시 : 그리고, 공범이라니? 공범은 아무 이득이 없어서 존재 이유가 없다고 하지 않았나?
모노키츠네 : 오마지나 군, 왜 이렇게 성급해애애. 지금부터 공범에게 그 이득을 줄 테니까 잘 들어어어.
모노키츠네는 오마지나가 흐름을 끊었음에도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모노키츠네 : 이때까지는 공범이라고 해도 하양 취급이었기 때문에 검정으로서의 메리트가 없었지이이? 하지만, 이번 사건 한정으로, 공범도 검정 취급할 거야아아.
센이시 히치카와 : 그러면 '운명공동체'라는 단어를 쓴 건...
모노키츠네 : 맞아아아. 따지고 보면 검정이 두 명이 되는 셈이지이이. 승리하면 같이 졸업, 패배하면 같이 처형! 간단하지이?
그때, 누군가가 꽤나 불만 섞인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그 정체는 다름 아닌 코이노였다.
코이노 미노리 : 잠깐. 그것뿐이라면 저번 추가 동기와 다를 게 뭐지? 검정이 학급재판에서 승리하면 원하는 사람 한 명을 지목해 함께 졸업한다는 것.
코이노 미노리 : 오히려, 그 동기에선 있었던 하양으로서의 메리트가 이번 동기에서 공범으로서의 위험부담으로 변했으니 더 안 좋은 것 아닌가?
모노키츠네 : 확실히 그렇긴 한데에에... 대신, 하양들도 검정을 두 명 맞춰야 해서 추리 난이도가 어려워져어어. 그리고 어차피 전의 그 동기도 너희가 사용하질 않았으니까 지금 와서 따져봐야 어쩔 수 없잖아아아?
그 말에 코이노는 조용해졌다. 모노키츠네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여전히 납득이 안 가는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하나리 에린 : 하나만 더 물어보자. '공범'이라고 했는데... 정확히 그 기준이 뭐야?
에스티 : 하나리, 그런 걸 갑자기 왜..?!
하나리 에린 : 그냥, 학급재판이 정말 발생해 버리면... 알고 있는 편이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겠어?
하나리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왠지 섬뜩했지만, 검정을 더 잘 잡기 위해서의 이유라면 괜찮겠지. 애초에 그 웃음은 반복되는 죽음과 절망에 대한 일종의 실성으로 보이기도 했으니까.
모노키츠네 : 조건이라아... 딱히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진범과 내통했고, 살인을 목격했지만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사람 정도로 할까나아아.
하긴, 그게 바로 사전적인 의미의 공범으로서의 최소 조건일 테다. 내 언어로 정리하면, 진범이 하는 살인을 알고 있고 협력했으며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사람 정도가 될까. 또다시 이런 끔찍한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나 자신의 뇌내 사고 체계에 대한 약간의 경멸을 일으켰다.
결론적으로, 그 경멸은 다시금 회상이 되어 내 온몸에 전율했다. 나는 한쪽 눈을 찡그렸다. 기분은 역시나 별로였다.
센이시 히치카와 : 윽...
어젯밤과 부정적으로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면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머리를 짚자, 아이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았다. 피해 주기는 정말 싫었는데 말이다.
신마에 히요리 : 세, 센이시..! 괜찮아..?
센이시 히치카와 : 미안해. 그냥 요즘 컨디션이 좀...
히네노야 나오미 : 하아, '좀' 나쁜 게 절대 아니잖아. 센이시 넌 강제로라도 방에 밀어 넣어서 쉬게 할 테니까 그전에 제 발로 쉬러 가.
센이시 히치카와 : 고, 고마워.
걱정을 받고 보니 어느새 모노키츠네와 코이노, 오마지나는 사라져 있었다. 전하고자 한 말은 그게 다였던 것 같다. 두통은 사라지지 않았기에, 나는 걱정의 시선을 더 받아버리기 전에 먼저 자리를 떴다.
어지러운 감각을 뒤로하고 개인실 문을 열자, 다행히도 어제와 같은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침대로 가서 제대로 누울 수는 있는 상태였다. 그래도 그전에 해둘 게 있었다.
센이시 히치카와 : 두 번째 서랍이었던가...
나는 서랍을 뒤져 어제 목표로 했지만 실패했던 두통약을 꺼냈다. 문제가 있다면, 물이 없었다. 물을 받으려면 다시 식당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랬다가는 히네노야에게 한 소리 들을 게 뻔하다. 세면대에서는 나오겠지만, 그게 식수라고 장담할 수도 없다.
센이시 히치카와 : 어쩔 수 없나... 좀 쓰긴 하겠지만.
나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약 하나를 꺼내 냅다 입 안으로 투척했다. 어떻게든 침을 모아 삼키려고 했지만, 애석하게도 첫 번째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알약이 녹아버려 더럽게도 썼다. 다행이게도 두 번째 시도에서는 삼킬 수 있었다.
센이시 히치카와 : 이걸로 어느 정도 됐으려나...
별로 자고 싶지는 않았지만, 쉬는 동안 할 것도 없어 그냥 낮잠을 좀 자기로 했다. 저녁도 먹어야 하고, 오늘 치 조사도 해야 하니 몇 시간만 자고 일어나야겠다. 나는 침대에 누워 쓴맛이 가시지 않은 입으로 길었던 어제의 일을 간략히 정리했다.
센이시 히치카와 : 3층... 미술실 창... 보건실... 탈의실... 감시카메라가 없다... 두통... 의식이...
공교롭게도, 내 생각의 흐름이 한창 내가 의식을 잃고 쓰러진 부분으로 갈 즈음에 내 몸 또한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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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타미츠의 연구교실에는 여전히 그가 생전 자아낸 따뜻한 공기와 안락한 분위기가 만연하고 있었다. 하타미츠가 바로 이틀 전까지만 해도 여기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코이노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을 잡아둔 것이었다. 코이노는 쭈그려 앉아 말끔히 청소되어 먼지 한 톨 없는 바닥을 만지며 혼자 중얼거렸다.
코이노 미노리 : 컵 파편... 정말 말끔히 치워버렸네. 아직도 홍차 냄새가 진하긴 하다만 뭐...
코이노가 그러고 있는 동안, 그녀와 약속한 누군가가 패드를 인식하고 방으로 들어섰다.
??? : 연구교실은 이렇게 생겼었지. 아직도 하타미츠의 죽음이 실감이 안 나네... 굳이 여기로 부른 이유가 있어?
코이노 미노리 : 네가 느끼는 그 꺼림칙함 때문이야. 사건과 관련이 있던 장소면 아무도 안 올 것 같잖아? 아예 시체가 있던 창고였으면 더 좋았겠지만 아무래도 이쪽이 좀 더 으슥하고 구석에 있으니까.
??? : ... 너답다고 해야 할지.
??? : 그래서, 용건이 뭔데?
코이노는 그녀가 불러낸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타이밍에 빠르게 입을 열었다.
코이노 미노리 : 난 질질 끄는 건 질색이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네가 내통자지?
??? : ...
한순간이었지만, 상대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원래 표정을 읽을 줄 아는 코이노가 그 찰나를 놓칠 리가 없었기에, 상대는 그 갑작스럽지만 치명적인 말에 대해 반응을 꺼내야 했다.
??? : 글쎄, 어떨까?
코이노 미노리 : ... 뭐, 알겠어. 내가 알아챈 시점에서 네 반응은 별로 중요하진 않아. 내통자는 지금까지 무슨 임무를 받았지? 실행으로는 옮겼나? 현재 더 해야 할 임무가 있나?
??? : 대답할 수 없어. 일단 내가 지금까지 손을 쓴 일은 딱히 없다고만 해둘게.
코이노 미노리 : 결국 시인한 거야?
??? : 내 반응은 중요한 게 아니라며. 얼버무려봤자 소용없잖아.
의외로 순순한 내통자의 모습에 코이노는 살짝 놀랐지만, 평소의 모습을 상상했을 때 코이노에게는 예상 못할 일도 아니었다. 원래 길게 물고 늘어지는 성격이 아님을 코이노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코이노 미노리 : 그래서 결론은, 아무것도 안 했다?
??? : 현재까지는.
코이노 미노리 : 잠깐, 하나만 더. 어쩌다가 내통자가 된 거야?
??? : ...
내통자는 이번 질문에는 꽤 동요했다. 아까의 덤덤한 반응과는 달랐다.
??? : 일단 나도 흑막의 감시를 받고 있으니까 자세히는 말할 수 없어.
??? : 내가 처음 이곳에 와서 눈을 떴을 때, 모노키츠네가 나에게 다가왔어. 그리고 내 가족의 신변으로 나를 협박해서 내통자가 될 것을 제안해 왔어.
코이노 미노리 : 대충 그럴 거라 예상은 했는데 진짜였네. 말이 제안이지 사실상 강요인 방식. 굳이 학생 16명 중 너인 건 아무 이유 없고?
??? : 그에 대해선 아무것도 못 들었어. 그래도 일단 가족이 걸렸으니 뭔지 모르지만 받아들였지...
대충 정황이 밝혀지자 코이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따로 지참한 작은 노트에 필기를 마치고 노트를 접었다. 내통자는 괴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 : 결론적으로는... 이렇게 됐네.
코이노 미노리 : 모르는 사람 15명이랑 가족 중에 고르라면 후자가 당연히 일반적인 거잖아. 운이 안 좋았던 거지.
??? : 위로할 필요 없어.
코이노 미노리 : 딱히 위로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 : 그럼 됐어. 얘기는 끝이지?
내통자는 무심하게 고개를 홱 돌렸다. 묘하게 냉소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내통자는 문 앞으로 걸어갔다. 나가기 전에, 내통자는 코이노를 한 번 더 돌아보았다.
??? : ... 일단 너만 알고 있어.
코이노 미노리 : 퍼트려봤자 뭐가 이득 된다고.
??? : 하여간 이득만 생각하지.
내통자는 그 말을 끝으로 문 뒤로 사라졌다. 코이노는 얻은 게 많다고 혼잣말하며 노트에 적힌 빼곡한 글씨를 다시 한번 눈으로 읽었다. 바쁜 눈동자가 노트 위의 흑연을 벗어나 시계로 향했다. 4시. 그렇게 많은 이야기는 한 것 같지 않은데도 시간은 훌쩍 지나있었다. 혼자 생각을 너무 많이 한 건지도 모른다. 코이노는 한숨을 쉬면서 연구교실을 빠져나갔다.
--
... 이... 나...
... 어나...
일어... 나...
일어나!
센이시 히치카와 : 아... 지금 몇 시지..?
나는 익숙한 의문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낮잠 특유의 뻐근한 기색이 남아있는 걸로 보아 다행히도 제때 일어난 것 같았다. 그것 외에는 머리도 맑아졌고 컨디션도 회복된 기분이었다.
시계를 보니, 5시. 적당히 오후에 잘 일어났다는 걸 확인하니 마음이 놓였다. 저 목소리가 알람 시계 역할도 해주는 건가. 좀 성가시지만 도움이 될 때도 있는 것에 놀랐다. 눈을 좀 비비고 세수를 한 뒤 밖으로 나섰다.
하나리 에린 : 응? 히치카와! 일어났어?
시나하라 아쿠아 : 머리는 좀 괜찮아졌어..?
센이시 히치카와 : 응. 걱정해 줘서 고마워.
방 밖으로 나서자마자 복도를 지나던 하나리와 시나하라를 마주쳤다. 방향을 보니 대충 하나리의 방으로 가고 있는 것 같았다. 원래도 같이 다니던 둘이 요새 더 자주 같이 있는 것 같다. 서로가 의지가 되기 때문일까? 이런 상황에서 유대감은 훌륭한 버팀목이 될 것이기에 긍정적인 시선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하나리 에린 : 그럼 우린 가볼게! 히치카와, 몸 조심해.
시나하라 아쿠아 : 잘 가.
센이시 히치카와 : 고마워, 너희도 잘 가.
나는 생각 없이 일단 식당으로 향했다. 아마 아침에 일어나서 방을 나서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라 어쩔 수 없이 몸이 따르는 것 같은데... 참 습관이란 무섭다. 이런 곳에서 보낸 짧은 시간도 습관을 만드는구나.
식당 문을 바로 열자, 일상과 같은 화목한 분위기가 있... 어야 할 터였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뭔가 다들 험악한 표정이었다.
토라시 치사토루 : 아, 센이시 왔나?
센이시 히치카와 : 토라시... 다시 사투리 쓰네? 덕분에 괜찮아졌어. 그런데... 이 분위기 대체 뭐야?
에스티 : 아니, 글쎄... 코이노가 보이는 애들마다 식당으로 모아서는 갑자기 내통자와 얘기하고 왔다고 얘기하잖아!
우선 내 귀를 의심했다. 남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으니 일단 제 귀부터 의심하고 봐야 할 것 같았다.
코이노 미노리 : 응. 말 그대로야. 빠른 설명 고맙네.
센이시 히치카와 : 누구인지 밝힐 생각은...
코이노 미노리 : 당연히 없지. 너네 일행 중에 있을 텐데 말해서 뭐 해?
센이시 히치카와 : 뭐, 나도 내심 밝히지 않길 바랐고...
코이노는 빈정거리는 투였지만 쏘아붙이듯 말했다. 그때, 신마에가 조용히 빈틈을 파고들었다.
신마에 히요리 : '너네 일행 중에 있다'는 건, 오마지나는 내통자가 아니라는 거야..?
히네노야 나오미 : 확실히, 그렇게 되네. 오마지나는 우리랑 같이 안 다니니까.
코이노 미노리 : 그럼 걔가 흑막이 이것저것 시키는데 미쳤다고 추가로 그 지랄 떨겠냐. 걔는 뭔가 사연이 있다는 기미도 안 보여. 그냥 미친놈이야.
후카바야시 츠이키 : 뭔가 한 맺혔는데? 나도 싫어하긴 하지만, 너희는 작당모의한 거 아니었어?
코이노가 조금 놀란 듯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그 사유는 좀 터무니없었다.
코이노 미노리 : 네가 작당모의라는 단어를 알아..?! 이거 놀랍네.
후카바야시 츠이키 : 대체 날 얼마나 빡대가리로 보는 거야?!
코이노 미노리 : 좀 많이?
후카바야시가 당장이라도 코이노에게 달려들 듯한 기세를 취했지만 일단 말렸다. 오마지나의 눈처럼 되면 적잖이 큰일 날 것 같으니까.
코이노 미노리 : 얘기가 좀 샜는데, 언어학자와 나는 협력한 사이가 절대 아냐. 걔 혼자 착각하는 거니까. 걔한텐 절대 말하지 마. 나중에 결정적인 순간이 온다면 자의든 타의든 간에 깔게.
오마지나가 배신당했다는 건 좀 불쌍하게 느껴졌지만, 우리 전원의 몰살을 목표로 하는 데다 애초에 코이노가 협력했다고 느낀 적도 없다면 그건 배신이 아니고 그냥 적인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연민 따위의 감정은 전부 사라져 버렸다.
에스티 : 아니... 이야기가 좀 샌 게 아니라 많이 샜다고. 내통자랑 얘기해서 알아낸 게 뭔데?
코이노 미노리 : 일단 내통자는 아무것도 안 했대. 현재까지는. 그리고 가족 관련 협박을 받아서 내통자가 된 거라네.
캡틴 유레이 : 내통자가 된 동기가 중요한가?
코이노 미노리 : 중요하지. 알아야 할 건, 내통자가 완전히 흑막 편이 아니라는 점이야. 애초에 가족을 위협하는데 순순히 따를 리도 없고, 나에게 정보를 어느 정도 알린 것도 반항이지. 뭐, 멀쩡한 거 보니 그다지 중요한 내용은 없었던 것 같다만.
토라시 치사토루 : 그리 생각하면... 잘하면 내통자를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모른데이..!
코이노와 토라시의 말은 충분히 타당했다. 내통자도 사람. 내통자도 피해자. 내통자도 분명 소중한 사람을 잃지 않으려 한 거다. 흑막에게 협력하겠다는 마음보다는 증오가 훨씬 크겠지.
코이노 미노리 : 그래도, 난 일단 알리지 않을 거야. 아까도 말했지만, 설득이 실패하면? 불화가 생길 거고 탈출에서 한 발짝 멀어지겠지.
코이노 미노리 : 만약 본인이 스스로 밝히겠다면 딱히 말리진 않아. 순전히 본인 의지고, 대화할 때 괴로워하는 것 같기도 했어.
에스티 : 그래봤자, 흑막이랑 내통한 거잖아? 난 아직 완전히 믿을 순 없는데...
코이노 미노리 : 그래, 그러니까... 일단 조금만 더 기다려 봐. 성급한 해결은 항상 재앙을 불러와. 그래도 이건 충고일 뿐이야. 해결은 결국 너희 나름이니까.
코이노는 매정하게 등을 돌려 식당을 나섰다. 식당에 남은 우리들은 서로를 어색한 눈치로 살폈다. 내통자가 이 사이에 있을 수도 있다. 그 내통자를, 동료였고 지금도 동료일 가능성이 있는 자를 믿어야 하는가, 의심해야 하는가. 코이노는 해결은 우리 나름이라고 했다. 마음이 복잡했다. 내가 잘 해낼 수 있을지에 대한 자신이 없었다.